작성일 2023-08-21
합천의 인심을 생각하면 팔이 안으로 굽어지는 건 인지상정이다. 대통령 재임 중에 고향을 위해 힘써준 고마움도 있을 것이다. 그래서 누가 뭐라고 해도 전두환씨는 합천의 자랑이다. ‘성공한 쿠데타는 처벌할 수 없다’는 논리로 검찰이 불기소 처분(정희상, 12·12 군사쿠데타와 인권유린의 현대사, 《시사IN》 2021년 12월 7일 통권 742호, 19쪽)할 때까지만 해도 광주 유혈진압은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을 것이라는 동정여론이 많았다.
그러나 국회에서 공전하던 「12·12특별법」과 「5·18 민주화운동 등에 관한 특별법」이 여야 합의로 만들어지고, 뒤늦게 검찰에 특별수사본부를 설치하고 전두환씨에게 소환장을 보내면서부터 그의 진면목을 볼 수 있었다.
전씨는 “5공화국의 정통성을 부정하는 것은 좌파 운동권의 주장과 같으므로 검찰 수사에 응하지 않겠다.”는 골목 성명을 발표하고, 고향인 경남 합천으로 내려 왔다. 금의환향과는 전혀 딴판이었으나 고향분들은 전씨의 사정을 십분 이해하면서 좌파 운동권을 비난하였다. 좌파라고 매도하면 모든 게 정당화될 줄 알았다.
그러나 1995년 12월 3일, 검찰은 전두환씨를 도주자로 간주해 구속영장을 들고 합천으로 내려와 체포하여 서울로 압송했다. 이 과정을 지켜본 합천 고향분들은 정권이 바뀌어 억울하게 정치적으로 탄압받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재판을 통하여 12·12쿠데타와 5·18광주진압은 합동수사본부장이며 보안사령관이며 중앙정보부 부장인 전두환씨와 하나회가 사전계획하고 주도한 게 밝혀졌다.
합천 율곡면에 있는 그의 생가 안내판에는 '1979년 3월 국군보안사령관으로 임명됐으며 그해 10월 박정희 대통령 시해 사건이 발생하자 합동수사본부장을 맡게 됐는데, 그 수사 과정에서 12·12사태가 빚어졌다.‘고 적혀있다. 마치 (12·12군사반란을) 전두환씨가 주동한 것이 아니라 당시 맡은 지위와 역할 때문에 사건에 개입된 것처럼 적어 놓았다.
공원 입구 도로변에 있는 일해공원 표지석에는 20톤 바위에 한글로 ‘일해공원’이라고 새겨져 있다. 뒷면에는 ‘이 공원은 대한민국 제12대 전두환 대통령이 출생하신 자랑스런 고향임을 후세에 영원히 기념하고자 대통령의 아호를 따서 일해공원으로 명명하며 이 표지석을 세웁니다.’라고 적혀있다. 글씨는 대통령 전두환이 썼고, 표지석은 합천군수가 2008년 12월 31일에 세웠다. 군수 이름은 적혀있지 않고 대통령 이름만 있다. 표지석 받침대에는 무궁화가 새겨져 있었다.
누구나 판단은 자유롭게 할 수 있다. 다만 사실에 근거한 판단이어야 한다. 전두환씨가 고향을 빛낸 인물이 아니라 정반대로 고향분들의 사랑을 저버리고, 고향을 먹칠했다는 걸 다음 두 가지 사실만 봐도 알 수 있다.
하나는 전두환씨가 12·12반란부터 광주5·18과 5·31 국보위 상임위원장이 되기까지 전개된 반란과 내란의 중심에 있었다. 또 하나는 그가 말한 것과는 달리 1980년 5·18광주는 혼란, 내란이 아니고 민주화운동이었다. 오히려 내란을 일으킨 자는 전두환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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