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2023-06-25
만은 홍재가 운구대에 은거할 때는 운구서당이 없었다. 서당은 한참 뒤에 생겼다. 영조시대 1773년, 인근에 있는 장단(長湍)마을에 있던 운구서원을 전교(傳敎) 받아 운영하다가 1786년에 운구대 옆으로 옮겨 세 분을 모두 봉향했다. 1868년 대원군 서원철폐령으로 허물어졌는데 100여 년이 지난 1964년 운구서당으로 재건되었다가 건물이 너무 낡아서 유지관리가 힘들어 홍씨 문중에서 2000년에 다시 지었으며 이때 유허비도 개견(改堅)하였다. 현재 서당은 풍산(豊山) 홍씨(洪氏) 제실로 사용되고 있다.
서당 입구는 자연스런 돌계단으로 되어 있고 유의문(由義門)이라는 현판이 대문에 걸려있다. 정몽주와 이언적을 추모하기 위해 1678년(숙종 4년), 울산광역시 중구 반구동에 세운 구강서원(鷗江書院)에도 유의문이 있고, 1799년(정조 23년), 창녕군 이방면에 세운 동산서당에도 구인루(求仁樓)를 들어서서 마당을 지나면 강당으로 가는 유의문이 있다. 유의는 거인유의(居仁由義)에서 따온 말인데 ‘인(仁)에 머물고 의(義)를 따른다’는 뜻이다. 운구서당의 대문 문지방으로 활처럼 굽은 나무가 놓여있다. 20㎝가 넘는 높이의 이 나무를 넘어서야 서당 안으로 들어갈 수 있다.
운구대와 서원 전체를 둘러보고 마을로 내려오는데 입구에 푸른 소나무 한 그루가 외로이 서 있다. 마을은 낮은 동산으로 에워싸여 있어서 아늑한 분위기였다. 사방이 경사진 기슭이어서 계단논만 조금 있는 동네이다. 마을에서 삼가면으로 가는 길은 계속해서 내리막 산길이었다. 이 마을은 지금도 산중이지만 600여 년 전에는 정말 첩첩산중이었을 것이다.
오늘날 은둔이라는 말은 사라졌다. SNS시대에 조용히 혼자 숨어있을 곳이 없다. 지조, 절개라는 말도 거의 시용하지 않는다. 말할 기회도 없고, 들을 일도 없다. 구시대의 단어가 되어버렸다. 유일하게 TV 역사드라마에서나 들을 수 있다. 공연히 지조와 절개를 들먹이면 대번에 꼰대 취급을 받게 된다. 그러나 눈앞의 이익을 위해서 자신의 신념을 헌신짝처럼 버리는 것은 지금도 신경 쓰이는 문제다. 비록 이 세상에 변하지 않는 것은 하나도 없다 하더라도 만약 고려 말에 정몽주가 없고, 단종에게 사육신이 없었다면 우리는 역사에서 교훈을 배우지 못할 것이다. 다행히 경남에는 3은이 있다. 함안과 합천에 은거하며 세상과 타협하지 않고, 지조를 지킨 모은, 금은, 만은이 있어서 경남은 자랑스런 고장이 되었다.
전점석(경남작가회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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