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2023-04-03
합천에서 압송된 지 5일만인 1623년 4월 3일이었다. 저잣거리에서 시체를 사방에 옮겨가며 내걸어 뭇사람들에게 경고의 뜻을 알리는 형벌인 정형(正刑)이었다. 다행히 후손들은 연좌되지 않고 살아남았다. 내암의 시신은 동계(桐溪) 정온이 운구하여 합천군 가야면 야천리 산 77번지의 상각사촌(上各寺村) 선영에 묻었다. 광해군 때 제주에 유배되었던 정온은 인조반정 후 풀려나서 대간에 임명되었는데 자신이 정인홍의 제자라면서 사직소를 올려 구명운동을 하였고 처형된 뒤에는 모두들 공연한 오해를 받을까봐 외면할 때에 시신을 수습하여 장례를 치루었다. 현재 묘소 앞에 있는 안내판에 의하면 인조반정이 일어난 1623년(광해군 15)에 역적으로 처형당했기 때문에 그의 묘를 세상에 알리지 못하였다고 한다. 당시의 서인들은 내암이 스승으로부터 받은 학문을 ‘괴이한 학문’이라고 매도하였고, 의병활동을 하면서 모병과 양곡을 모은 것은 향곡(鄕谷)을 힘으로 눌렀다고 비난했다. 이런 터무니 없는 비난이 계속된 것은 자신들의 반정 명분이 충분치 못하였기 때문이었다. 특히 권력 기반이 약했던 인조 초기에 1, 2차 광해복위사건의 처리과정에서 북인을 모조리 제거하였다. 심지어 합천군이 정인홍의 고향이란 이유로 1629년(인조7)에 합천현으로 격하되었다가 15년 후인 1644년(인조22)에 합천군으로 복귀되었다. 합천이 역적의 고장이라고 매도되는 것을 안타깝게 생각하는 사람들은 정인홍을 원망했다.
집권세력인 서인은 내암의 흔적을 지우기 위한 노력을 집요하게 했다. 그만큼 내암의 권위가 살아 있었던 것이다. 그의 처참한 죽음과 함께 남명학 역시 역사 속에 깊이 묻히고 말았다. 내암은 물론이고 남명의 저술 대부분이 불태워지거나 유실되었다. 경상대 이상필 교수는 북인의 영수이자 남명 조식의 수제자였던 내암이 죽자 남명학파도 사라졌다고 한다. 남명학파는 대부분 퇴계학파인 남인의 문하로 들어갔고, 일부는 서인으로 들어갔다. 서인에 이어 집권세력이 된 노론은 스승과 제자를 분리하여 스승은 인정하고, 제자는 비난하는 이중 전략을 구사했다. 몇 가지 예를 들면 남명의 교유 인명록인 산해사우연원록(山海師友淵源錄)과 남명집 임술본 등을 만들 때 정인홍에 관한 내용을 삭제하였다. 노론인 송시열, 김육, 이식 등은 줄기차게 정인홍을 비난하였다. 내암을 조금이라도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사람은 가혹하게 탄압했고, 관련 책도 만들지 못하도록 했다. 그러나 남명을 추모하기 위해 삼가현에 만든 용암서원 강당 앞에 송시열이 지은 글로 1812년(순조 12) 묘정비(廟庭碑)를 세웠고, 1909년에는 남명 묘소 앞의 별묘(別廟)에 송시열이 쓴 남명신도비까지 건립하여 노론의 정치적 헤게모니가 경상우도의 남명학파까지 장악했음을 보여주었다. 송시열의 글씨는 함벽루에도 새겨져 있다.
그의 스승인 남명이 죽은 지 200년이 지난 1796년(정조 20)에 정조가 예관으로 예조정랑 민광로(1749~1813)를 내려보내 치제할 때에 공식적으로 남명을 인정한다는 의미를 담은 사제문을 내려보냈다. 공인(公認)을 대가로 불의를 보고 호령하는 남명이 아니라 은둔생활자로 왜곡된 이미지를 받아들인 남명의 제자들은 이제 공개적으로 집단활동을 시작할 수 있었다. 경상우도의 유생들은 힘을 모아 1818년에 산천재를 중수하였는데 아직도 집권세력인 서인은 내암을 복권시키지 않았다. 정치적 계산으로 남명과 내암을 분리하였던 것이다. 그나마 집권 서인의 서슬에도 불구하고 내암을 추종하는 이들은 내암의 허름한 고택을 사당 삼아 무려 100여 년 동안이나 그의 영정을 모셨다고 한다.
(이번 탐방 내용은 총 3회에 걸쳐 게재될 예정입니다.-편집자 주)
전점석(경남작가회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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