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2024-09-09
황강신문은 합천교육지원청에서 진행하고 있는 ‘미래교육지구 학생마을기자단’ 사업에 협력하고 있으며, 이 활동을 통해 지난 1학기에 학생마을기자들이 취재한 기사를 모아서 소개하고자 한다.- 편집자 주 |
우리 민족에게 동족상잔의 참극이 벌어지고 있던 1951년 12월 18일, 미군으로부터 해인사를 폭격하라는 명령이 내려졌습니다. 4기의 공군 편대가 이 명령을 받았는데 그 당시 편대장은 김영환 대령이었습니다. 그때 전투기에는 네이팜탄과 로케트턴이 실려 있었습니다. 만약 네이팜탄 하나만 터뜨려도 해인사와 팔만대장경은 눈 깜짝할 사이에 잿더미로 변해 버릴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김영환 장군은 그 명령을 거부하고 해인사와 뚝 떨어진 곳에 기관총만 쏘았다고 합니다. 해인사를 폭파하라고 명령을 내린 것은 가야산 일대에 있던 인 민군 낙오병과 유격대의 근거지를 없애기 위해서였습니다.
그 무렵 가야산 일대에 유격대가 있긴 했지만 해인사 주지이셨던 효당 최범술 스님은 유격대 지도부와 담판을 통해 "당신들이 이곳에 있으면 미군에게 찬란한 민족문화의 보고인 해인사를 폭파할 빌미를 주는 것이니 제발 떠나 달라."고 했으며, 유격대는 얼마간의 양식을 얻은 뒤 심사숙고 끝에 그곳을 바로 떠났다고 합니다.
그때나 지금이나 전시 작전권이 없는 우리 국군으로서는 상부인 미군의 명령을 거부하기가 어려운 상황이었습니다. 그 당시로는 전시인지라 이런 일로 즉결처분을 받을 수 있어 목숨을 걸지 않고서는 하기 어려운 항명이었습니다. 31세의 김영환 장군은 우리 민족문화의 소중함을 남 달리 인식하여 그 명령을 거부하고 해인사와 팔만대장경을 지켰기에 그 누구보다도 정말 자랑스럽습니다.
그 뒤 김영환 장군은 명령불복종죄로 미군작전사령부에 호출되어 간 자리에서 “해인사의 팔만대장경은 셰익스피어와 인도를 다 주어도 바꿀 수 없는 보물 중의 보물이다.”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치열한 전투 속에서도 우리 문화를 지킨 김영환 장군을 길이 기억하고, 우리 모두 그의 고귀한 뜻을 본받아야겠습니다.
그의 업적을 길이 기리기 위해 필자는 다음과 같이 세 가지 방안을 제안합니다.
첫째. 김영환 장군의 업적을 영원히 기리기 위해 합천군청의 지원을 받아 '김영환 장군 기념관'을 건립한다.
둘째. 매년 12월 18일을 '김영환 장군 기념일'로 지정해 그의 업적을 기리는 행사를 개최한다.
셋째, 김영환 장군의 생애와 해인사 보호의 이야기를 담은 다큐멘터리를 제작해 널리 배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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